Thursday, November 21, 2024
Daily Story

모정(母情)

308views

리컨은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으면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 먹입니다. 병에 걸려 죽어가는 새끼에게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줍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개는 새끼를 낳으면 새끼들의 똥 오줌을 핥아먹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강아지들은 항문과 요도가 막혀 죽고 맙니다. 그래서 개는 자신의 젖이 떨어져 새끼들이 밥을 먹을 때까지 새끼들의 똥 오줌을 어미가 다 핥아먹는 것입니다.

남극에 살고 있는 황제펭귄의 암컷들은 알을 낳으면 수컷에게 알을 품는 일을 맡긴 후 뒤뚱거리며 100km 이상을 걸어 바다에 가서 새끼에게 줄 먹이를 물어오는데, 그럴 때면 혹시라도 자신이 먹이를 먹을까봐 먹이가 담긴 소낭에 아예 보호막을 쳐서 소화기능을 정지 시킵니다.

천신만고 끝에 새끼가 있는 곳에 돌아왔을 때 만에 하나 새끼가 이미 죽고 없으면 소낭속의 먹이를 그냥 토해 버릴지언정 자기가 먹는 일은 절대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한 동물원에서 하루에 물고기 2~3kg을 배급받던 황제펭귄 한 마리가 굶어죽은 일이 있었는데, 자신에게 배급된 모든 먹이를 새끼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의 전국시대 때 진나라 군사들이 촉나라 땅을 정벌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양자강 기슭, 삼협이란 곳에서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 배에 싣고 갔습니다.

그런데 배가 삼협에서 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정박하자 어미 원숭이 한 마리가 배에 뛰어올라 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신기하게 여긴 군사들이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습니다.

삼협에서 새끼를 빼앗긴 어미가 벼랑으로 이어진 백여리 강 기슭을 뛰어서 따라왔던 것이고, 새끼를 잃은 비통함에 창자가 끊어졌다는 단장(斷腸)의 고사입니다.

동물학자들은 ‘단장(斷腸)’의 고사가 실제로도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고릴라나 오랑우탄, 침팬지 등은 새끼를 업거나 안 고 다니는 경우가 많으며, 새끼가 죽으면 시체가 썩을 때까지 새끼를 안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1962년 2월 10일, 여수 남국민학교 졸업식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졸업식장에서 회색 스웨터에 까만 낡은 바지를 입은 중년부인이 노력상을 받았습니다.

그 부인이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자 장내는 박수소리로 떠나갈 듯했고, 졸업하는 그 부인의 딸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노력상을 받은 어머니와 딸은 세 채 밖에 집이 없는 외딴섬에 살았습니다.

주민이라고는 겨우 20명 뿐 인 이 섬에서는 제일 가까운 여수에 볼 일이 있어도 섬사람들이 직접 만든 배를 타고 갈 수 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여덟 살이 되자 남편에게 딸을 육지에서 공부 시키자는 말을 어렵게 꺼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20리나 되는 뱃길을 어떻게 다닐 수가 있겠느냐” 며 반대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믿음을 굽히지 않고 딸을 남편 몰래 육지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20리나 되는 험한 물결을 가로지르며 손수 노를 저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섬으로 돌아와 밭일을 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배를 타고 딸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딸도 울고 그 어머니도 울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육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두려워 울었고, 어머니는 딸을 데리러 가는 길이 늦어 딸이 애처로워 죽을 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울었습니다.

시계도 없는 섬에서 매일 시간을 맞춰 딸을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에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6년을 하루같이 오간 뱃길이 무려 3만 3천리나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졸업생과 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의 감격스러운 울음으로 졸업식장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이 많은 이흥렬(李興烈)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음악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피아노가 없으면 작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피아노가 없으니 음악공부를 더 이상은 할 수 없어요. 음악에는 피아노가 필수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소자는 음악공부를 이만 접고 귀국하려고 합니다.’

어머니는 혼자 몸으로 유학간 아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음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동네 산이란 산을 모조리 뒤져 두손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쉼없이 솔방울을 줏어 모았습니다.

불쏘시개로 화력이 좋은 솔방울을 팔아 거금 400원 (1930 년대 쌀 한가마는 13원)을 만들어 아들에게 보냈습니다.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돈으로 피아노를 샀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번째로 작곡한 노래가 이흥렬 작곡 양주동의 詩 ‘어머니의 마음’ 입니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소싯적 시골집 울타리에는 해마다 오월이면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

찔레꽃은 꽃송이가 소소하고 갸날프면서 질박합니다. 그러나 그 향은 짙고 강렬합니다. 그런 찔레꽃을 볼 때마다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웬지 애상적이면서 온정적인 이미지 때문일 것 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쏙 빼닮은 노래가사가 있습니다. 가수 이연실이 부른 ‘찔레꽃’ 입니다.

엄마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날 가만이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해질녁 어스름에 청솔가지를 한 아름 머리에 이고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있는 울타리를 돌아, 대(竹)사립문을 어렵사리 열고 들어오시면서 “니 배고프재” 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모습,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이기에 더욱 가슴이 쓰리고 아픕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회한과 그리움에 그냥 땅바닥에 주저 앉아 “어무이! 어무이!”하고 엉엉 울고 싶어지는 오늘입니다.

Leave a Respo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