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2, 2024
Daily Story

백년 후 나의 殘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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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고 백 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백년이 넘은 조상 할머니 할아버지의 무덤을 정리했다.

남의 땅 산자락에 남아 있는 봉분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폐가되기 때문이다. 백 년 전 죽은 조상 할머니 할아버지는 누구였을까.

가족도 친구도 그 시절 같이 살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 손자 손녀도 죽었다.

그 손녀의 아들이 나다. 조상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남은 것은 흙 속에 묻혀있던 작은 뼈 조각 몇 개 뿐이었다.

죽은 조상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과연 이 세상에 살았던 적이 있었을까.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겠지.

그분들은 이제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다. 나는 조상의 화장한 유골을 그분들이 살던 고향의 양지바른 산 위에 뿌려 드렸다.

내가 죽고 나서 백 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나의 가족이나 친구, 알던 사람들 모두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살려고 마련한 바닷가의 집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나의 재산도 또 다른 누군가의 소유가 될 것이다. 세월을 함께한 책장과 몇 개의 가구들도 모두 폐기물이 되고 나를 옮겨주던 고마운 차도 고철 덩어리가 될 것이다.

나는 바로 죽은 후에는 얼마 동안 가족과 몇몇의 기억 속에 남았다가 그 후로는 사진으로 있다가 무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의 후손들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삼사년 전쯤인가 나의 초상화가 지하실 문 앞의 구석에 다른 헌 액자들과 함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걸 봤다. 의뢰인이었던 화가가 그려준 것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될 것이다.

아파트에서 혼자 살다 죽은 노인들의 물품들이 쓰레기장에 나온다고 한다. 고급 책상과 가구들이 버려지기도 하고 벽에 걸려있던 가족사진들이 액자 속에서 세상을 내다보면서 서글픈 미소를 짓기도 한다.

인간이란 내남없이 세상에 와서 수고하고 번민하다 죽음이라는 무대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그 기억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잔고가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해 본다. 피와 살이 있고 생명이 붙어있는 이 나머지 시간이 내게는 정말 소중한 보물이다.

나는 지난 칠십년이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 왔을까… 소년 시절 경주마같이 트랙을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는 눈가리개가 씌워져 있었다. 세상은 학교로 인간을 상등품과 하등품으로 구별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품질 인증을 받기 위한 열망이 마음을 꽉 채웠었다. 그냥 낙오가 무서웠다.

대학시절 그런 경주 트랙에서 벗어나 초원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차별이 많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런 초원은 관념이고 추상일 위험성도 있었다. 그 초원으로 가는 중간에는 날개없는 내가 떨어질 바닥없는 깊은 절벽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가장인 나는 가족의 입에 밥을 넣어 주어야할 성스러운 의무가 있었다. 새 둥지 속의 털도 나지 않은 빨간 새끼들은 엄마 새가 힘들게 잡아온 벌레 한 마리를 먼저 달라고 입들을 한껏 벌린다. 나는 엄마 새의 벌레 같은 돈을 잡으려고 세상을 돌아다녔다.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주머니 속으로 옮기는 일이 내게는 공부보다
열 배 백배는 힘들었다. 돈을 주는 사람 앞에서 마음이 약해지고 주눅이 들었다. 내가 정직한 땀을 흘려 받는 대가인데도 눈치를 봤다. 돈은 내 영혼까지 지배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장년의 산맥을 넘고 이제 노년의 산 정상 부근에 오른 것 같다. 눈을 뒤집어 쓴 겨울나무같이 머리와 눈썹에 하얗게 눈이 내려와 있다.

삶에서 처음으로 자유롭고 여유있는 시간을 맞이한 것 같다. 이제야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학교도 직업도 돈도 더 이상 의미가 없는 평등한 세상으로 건너왔다.

황혼 무렵이면 바닷가 산책을 한다. 푸른 바다 저쪽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태양은 붉다 못해 타오른다. 황혼과 밤사이의 짧은 시간이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고 싶다.

오늘은 내가 죽고 백년 후의 세상을 한번 떠올려 보았다. 진작 그런 긴 안목으로 생각을 했었더라면 부질없는 많은 걱정을 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저녁노을 빛으로 남는다.

< 엄상익 변호사 및 칼럼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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