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2, 2024
Daily Story

무심코 던진 따뜻한 말

99views
    • 무심코 던진 따뜻한 말

    저는 우여곡절 끝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한 환자가 있습니다. 40대 초반의 여자였는데 위암이었죠. 하지만 이게 전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어요.

    그때만 해도 CT가 3cm 단위로 잘라져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암이 작으면 잘 보이지 않죠. 그러나 일단은 보고를 드려야 했죠.

    아침에 주임 과장에게 “이런 환자가 있었고, 전이가 확인이 안 됩니다. 하고 보고를 드렸더니 “배를 먼저 열어보고, 전이가 되어 있으면 닫고, 안 되어 있으면 수술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환자 보호자에게 동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걸 환자에게 이야기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가족과 보호자에게 이야기해 봤더니 남편은 죽었고, 시댁 식구들은 연락이 끊어졌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어, 부득이 환자 본인에게 직접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고등학교 아들과 중학교 딸이 하나 있는데 내가 죽으면 아이들을 어떡합니까?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야 합니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수술 날짜를 잡았죠. 헌데 배를 열고 보니 저희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가슴부터 배까지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되어있더군요. 작은 암세포로 전체가 퍼져 있었어요. 너무 심각했던 거죠. 바로 닫고 수술실을 나왔습니다. 그런 경우 대개는 급속도로 나빠집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하고 다시 환자에게 가려고 하는데… 저는 그 장면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창밖엔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가습기에선 희뿌옇게 수증기가 나왔고, 침대 옆에 아이 둘이 검정색 교복을 입고 엄마 손 하나를 둘이 잡고 서 있더군요.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느낌,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눈이 마주치자 환자가 저를 보시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해요.

    환자는 알고 있었던거죠. 수술을 했더라면 중환자실에 있었을텐데 일반병실에 있었으니까… 암이 전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거죠. 하지만 옆에는 애들이 있으니까 지금은 얘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아니나 다를까 수술 후 급속도로 나빠져서 퇴원도 못하고 바로 돌아가셨죠. 사망을 앞두고 며칠동안
    은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가고 병원을 왔는데 항상 그 자세였어요.

    손을 잡고 아이와 함께 셋이 서 있었죠. 결국 아이들의 엄마인 환자는 거의 임종이 다가왔습니다. 이때 의사가 할 일은 사망 시간이 임박하면 사망 확인하고, 시간 기록하고, 진단서 쓰는 게 다입니다.

    그런데 간호사한테 위독하다는 연락이 와서 환자 곁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시는 걸 지켜보면서 저와 간호사는 서 있었죠.

    두 세 차례 사인 곡선을 그리다가 ‘뚜뚜’ 하면서 심전도가 멈췄는데… 아이들은 또 예의 그 모습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죠.

    저는 속으로 ‘이걸 어떻게 보지?’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울지 않고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모르나 보다 해서 잠시 한 1분 정도 기다렸어요. 그러다 아이의 어깨를 눌렀더니 엄마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요. 봤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옷의 절반이 눈물로 젖어 있더라고요. 돌아가신 것을 아는거 였어요.

    저는 순간적으로 움찔 했습니다. 그리고 서있는데 그제서야 엄마에게 다가서서 왼팔로 목을 잡고, 오른팔로 어깨를 안아요. 그리고는 엄마 귀에 대고 뭐라고 말 했냐면요… “엄마 사랑해요” 하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떠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 “사랑해요”라는 말 안에는 떠나는 엄마에 대한 송별사일 수도 있고, 위로일 수도 있고, 남겨진 자의 각오일 수도 있죠.

    저는 많은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어떨 때는 제가 맡았던 환자가 하루에 5명이 돌아가신 적이 있었어요. 인간이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직위? 돈? 그가 누구든,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그가 무엇을 가진 사람이든,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마지막에 하는 단어가 바로 ‘손’이라는 겁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서 하루는 간호사가 “신부님이 오셨다.”고 하시더라고요. 놀라서, 제가 “누구십니까?” 했더니 대뜸 “저를 모르십니까?”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때 그 고등학생 이었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그 때 그 고등학생이 신부님이 되어 찾아와 주시다니~~~!

    제가 ‘혹시나 잘못한 게 없었나’ 하고 뜨끔 하더라고요. 이래저래 이야기를 나눠 보았더니 여동생은 교대를 가서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두 오누이가 곱게곱게 잘 자랐더군요.

    그러면서 신부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기억 못하시겠지만, 그 때 저희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너희 입장에서는 가혹하고 힘들겠지만, 엄마는 남겨진 너희들이 혹시나 잘못될까봐 눈 감는 순간 까지도 걱정했을 것이니 이런 엄마의 마음을 잊지말고 세상을 살아가거라.”라고요

    저는 제가 그렇게 멋있는 말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그 말이 두 오누이가 살아가는데 버팀목이 된 가장 중요한 말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에 벼락이 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멋있는 말을 했구나 하는게 아니에요. 저는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무심코 했던 작은 선의(善意)가 두 남매의 인생을 바꿨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찡합니다.

    무심코 던진 말, 기억조차 나지 않는 말로 어떤 사람은 희망을, 어떤 사람은 좌절을 겪게 됩니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 듯, 말의 파장이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애정과 사랑의 진심을 담은 착하고 유익한 말을 입에 담아야 하는가 봅니다.

    < '시골의사 박경철의 강연' 중에서 퍼온 글 >

    Leave a Respo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