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熱國誌) (17)

O 연(燕), 위(魏)의 멸망 진왕은 형가의 암살 미수사건으로 크게 노하여 조나라에 주둔중인 왕전 장군에게 20만 군사를 추가로 보내 주면서 연나라를 쳐서 귀족 양반들을 씨도 없이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왕전이 30만 대군을 휘몰아쳐 연으로 쳐들어가니 연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진군과의 전투에서 연전 연패를 거듭한 연왕은 성문을 굳게 잠그게 하고, 비상 대책회의를 열었다. "진군의 기세가 막강하여 우리로서는 대항할 방도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열국지(熱國誌) (16)

O 자객 형가(荊軻)나라가 잘 되려면 충신이 많아야 한다. 진나라에는 명장들이 수 없이 많았는데 그들 모두가 충신이어서 진이 강대국이 된 것도 그들의 덕택이었다.  그러나 그중에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는 명장 번어기(樊於期) 장군이었다. 번어기 장군은 성품이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대쪽같이 곧은 무장인지라 평소에도 <아무리 대왕의 명령이라 하여도 무조건 복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시비비를 가림없이 무조건 복종만 한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나 대왕을 위해서나 결코...

열국지(熱國誌) (15)

O 한(韓), 조(趙)의 멸망 노애의 반란 사건이 마무리 되자 진왕은 승상 이사를 불러 물었다. “그동안 내정(內政)이 어수선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던 사업이 지연 되었소. 이제 다시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야 하겠는데 어느 나라부터 정복하는 것이 좋을지 경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소이다.” 이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는데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국력이 가장 약한 한나라를 먼저 쳐서 손쉬운 싸움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군사들의 사기도 높일 수 있으리라 사료 되옵니다.”...

열국지(熱國誌) (14)

O 여불위와 노애의 몰락 노복을 천 명씩이나 거느리고 태후 주희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둘과 호화로운 영화를 누리고 있는 노애는 시간이 흐를수록 엉뚱한 욕심이 무럭무럭 끓어 올랐다. 그것은 기회를 보아 진왕을 쫒아내고 자기 아들을 그 자리에 올려 앉히고 싶은 야심이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아들을 형제나 두었으니 이제는 현왕을 쫒아내고, 우리들의 아이를 왕으로 내세워야 할 게 아닌가?" 노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노골적으로 나오게 되자 주희는 몸을 떨며 말했다. "그건 안...

열국지(熱國誌) (13)

O 간부(姦夫) 노애열세 살에 등극한 소년 정(政)이 열 아홉 살이 되자, 승상을 제쳐 놓고 국정을 직접 관장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권력의 직접 행사의 농도는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는 승상조차 턱으로 가리키며 지시하는 오만한 독재자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천하를 통일하려는 집념은 날이 갈수록 강렬해져서 진나라 백성들은 노약(老若)을 막론하고 자나깨나 군사 훈련으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절대 군주도 천재지변(天災地變) 앞에서는 속수 무책인고로 진왕 6년에...

열국지(熱國誌) (12)

"권력의 달콤함 때문에 후일 신세를 망치기 쉽다." 이 무렵 진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 가운데 영토가 제일 넓었다. 북방 경계는 멀리 호령, 곡구(谷口)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양자강 지류인 경수(涇水)와 황하 상류인 위수(渭水)를 둘러싼 곡창 지대와 서쪽으로는 서촉(西蜀)의 태산 준령이 가로 막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주었고,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효산(肴山)이 있어서 천혜의 난공불락(難功不落)의 성채가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는 쉬워도...

열국지(熱國誌) 10

열국지(熱國誌) 10

○ 여불위(呂不韋)의 고민 장양왕이 급서(急逝) 하고, 후일 천하를 통일하는 진시황(秦始皇), 소년 정이 열세 살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승상인 여불위가 국정을 전담하게 되었다.(나의 아들이 왕이 되었고, 태후인 주희는 나의 정부이고 보니 이제 진나라는 사실상 나의 나라다!) 사람 장사에 뜻을 두고 큰일을 도모한 지 14년, 여불위는 마침내 진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남편이 죽고 나자 주희의 애욕은 더욱 강렬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는 남편의 눈을 남모르게...

열국지(熱國誌) 9

열국지(熱國誌) 9

○ 지혜로운 사공자, 신릉군(信陵君) 초나라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나자 이번에는 위나라와 군사 동맹을 서둘러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평원군은 위나라와의 교섭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위왕의 아우인 지혜로운 사공자중에 한사람인 신릉군은 위왕의 아우인 동시에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데다가 평원군의 손아래 동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국적은 다르지만, 평원군이 신릉군의 고매한 인격에 매혹되어 자기 처제와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평원군이...

열국지(熱國誌) 8

○ "지혜로운 사공자" 중에 한 사람 조나라 평원군(平原君) 조왕(趙王)은 진군에게 37개의 성을 빼앗긴 데다가 "명년 봄에 다시 쳐들어 오겠노라"는 통고까지 받고 나니 국가의 존망이 크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사공자로 불리는 현명한 아우인 <평원군>을 불러 상의한다. "진군이 명춘에 다시 쳐들어오겠다고 하고 돌아갔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 평원군이 대답하는데, "우리의 힘 만으로는 진군을 당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똑같은...

열국지(熱國誌) 7

○ 자초의 등극과 여불위의 출세... (여씨 춘추 발간의 유래) 소양왕이 서거하자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를 효문왕(孝文王)이라 칭했다. 안국군이 등극함에 따라 자초가 태자로 책립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불위로 보면 득세(得勢)의 길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트인 셈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새로 등극한 효문왕이 건강이 워낙 좋지 않아서 왕위에 오른지 불과 사흘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불과 사흘 사이에 두 명의 왕이 잇달아 서거한 것이었다....

열국지(熱國誌) (11)

by | Mar 9, 2020 | 아지트, 열국지 | 0 comments

○ 여불위의 골치 아픈 존재

화창한 어느 봄날 진도(秦都) 함양(咸陽)에서 50리 쯤 떨어진 야외 넓은 들에서는 아침부터 난데없는 진조대전(秦趙大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조나라를 가상의 적으로 하는 군사 훈련 이었지만 치열한 공방전은 실전을 방불케 하였다.

진군의 총사령관은 열다섯 살의 소년 왕 자신이었고, 조군의 총사령관 역에는 진나라의 명장인 몽오 장군이었다.

마상의 소년왕은 장검을 하늘 높이 치켜 들고 가상의 적진으로 달려나가며 “적을 섬멸할 때는 바로 이때다! 진군은 용맹무쌍하게 총 공격하라 …. !” 하고 소리치며 앞장서 나아가자 만여 명에 이르는 군사들은 마치 호랑이떼처럼 포호성(咆號聲)을 지르며 가상 적진을 향하여 밀물처럼 휩쓸려 나갔다.

가상의 적, 조군도 총력을 기울인 방어전을 전개하였으나 진군의 조직적인 맹렬한 엄습에는 당해 낼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총대장 몽오 장군은 마침내 백기를 들고 나와 소년 왕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대왕 전하의 용맹한 공격에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그것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이었다.

열다섯 살밖에 안 되는 소년 왕이 어디서 병법과 지략을 배웠는지 군사를 통솔하고 정세를 판단하는 지휘력이 탁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년 왕 정은 빙그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조를 정벌했으니 내일은 초를 정벌하기로 합시다.”

소년 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로 거의 날마다 육국(六國)을 돌려 가며 가상의 적으로 설정해 놓고 군사 연습을 끈질기게 반복해 왔던 것이다. 통일 천하에 대한 소년 왕의 집념은 이처럼 강렬하였다.

소년 왕은 군사 연습을 끝내고 궁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증조 할아버지인 소양왕에게서 물려받은 유언장을 읽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태양이 하나밖에 없듯 땅에도 임금은 두 사람이 있을 수 없다. 너 정은, 증조부인 나의 웅지를 이어받아 육국을 모조리 정복하여 만천하를 하나로 통일하여라!”

소년 왕은 문제의 유언장을 하루에 백 번씩 읽기를 잊지 않았다. 유언장을 백 번 읽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우러러 이런 맹세를 하는 것이었다.

“하늘에 계신 할아버님이시여,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위대하신 유지를 받들어 만천하를 하나로 통일하고야 말겠습니다.”

소년 왕이 그날의 일과를 막 끝냈을 때에 태후 주희가 방안에 들어섰다. 왕궁과 태후가 거처하는 감천궁(甘泉宮)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러 날 만의 모자 상봉이었다.

“어마마마께서 웬일이시옵니까.” “거기 좀 앉거라! 오늘은 너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 왔노라.”

주희는 어머니의 위엄을 보이려고 시종을 시켜 옥좌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게 하고 마주 앉았다. 소년 왕은 어머니가 대왕인 자기와 정면으로 마주 앉는 무엄한 태도가 몹시 거슬렸다. 그러나 불쾌감을 참아 가며 물었다.

“상의하실 말씀이란 무슨 일이옵니까?” 태후 주희가 입을 열어 말했다. “너도 잘 알고 있다시피 여불위 승상은 돌아가신 너의 아버지의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네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도와 주신 어른이다. 그러므로 너는 이제부터 그 어른을 단순히 승상으로만 모실 것이 아니라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아버지처럼 모시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어마마마의 소원이 그러하시니 앞으로 여불위 승상을 중부로 부르겠습니다.” 소년 왕은 즉석에서 쾌락을 하고 나서 정색을 하며 주희를 향해 말을한다.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번에는 제가 어마마마께 엄명을 내려야 할 일이 하나 있사옵니다.” 주희는 <엄명>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아니, 엄명이라니? 아들이 어미에게 엄명을 내리는 일도 있느냐?” 소년 왕은 그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더욱 준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 나라의 대왕 입니다. 따라서 비록 어머님이라 할지라도 나의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옵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나를 단순히 아들로만 여기셔서 나를 항상<너>라고 불러 오시지만 이제부터는 <대왕마마>라고 부르시지 않으면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습니다. 지금도 대왕인 나를 무시하시고 옥좌에 마주 앉아 계시는데 비록 태후라 할지라도 그런 무엄한 행동은 용서할 수가 없사옵니다. 지금 당장 자리를 옆으로 옮겨 주십시오.”

주희는 전신에 소름이 끼쳐 와서 의자를 옆으로 비켜 앉으며 “내가 아직 대왕을 어린 자식으로만 여겨와서 무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고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며 존대말을 썼다.

소년 왕은 그제서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고로 왕은 절대권자 입니다. 그 절대권을 어마마마가 유린하시면 무슨 재주로 대왕의 권위를 세워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 점을 각별히 유념해 주소서…. 그리고 여 승상을 <중부>라고 부르라는 분부는 승상을 곧 불러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태후 주희는 궁을 물러 나오면서도 공포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소년 정은 자기 아들이면서도 이제는 마음대로 할수 없는 이 나라의 대왕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여 승상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구나. 만약 그 일이 알려지는 날이면 여 승상의 말대로 우리 둘은 목이 달아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날 이후로 주희는 모자간의 애정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태후가 나가자 소년 왕은 시종에게 명했다. “여 승상을 곧 입궐하도록 일러라.” “대왕마마, 불러 계시옵니까” 여불위가 부랴부랴 입궐하여 어전에 부복하자 소년 왕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승상은 번다한 국무를 처리해 나가느라고 수고가 많으시오이다. 오늘은 승상께 기쁜 소식 하나를 전해 드리려고 입궐하라고 하였소.” “무슨 분부이신지는 모르오나 홍은이 망극하옵니다.”

“기쁜 소식이란 다름이 아니오하 승상은 선왕의 생명의 은인이신 까닭에 오늘부터 나는 승상을 <중부>라고 부르기로 하겠소. 따라서 경은 공적으로는 이 나라의 승상이지만, 사적으로는 나의 중부가 되는 셈이오.”

물어 보나마나 그것은 주희가 배후에서 조종했음이 분명하였다.

“분에 넘치는 영광으로 고마운 말씀 다할 길이 없사옵니다.” 여불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혹시나 비밀이 탄로나지 않았을까 싶어 매우 불안스러웠다.

친아비가 누구라는 비밀을 알고서 그렇게 불러 준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있으랴.

그러나 소년 왕의 성격으로 보아 그런 엄청난 비밀을 알기라도 하는 날이면 결코 그냥 넘겨 버릴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 비밀을 모르면서 중부라고 부르겠다고 하니 여불위는 살얼음 판을 밟듯이 아슬아슬 하기만 하였다.

여불위는 본디 배짱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젊었을 때 같았다면 “정아! 너는 장양왕의 아들이 아니고 나의 아들이니라!”하고 자기 입으로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승상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고 영화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는 굳이 비밀을 털어 놓아 평지 풍파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중부> 호칭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락 되자 소년 왕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여불위에게 물었다. “승상은 소양대왕(昭襄大王)께서 내게 남겨 주신 유언장의 내용을 분명히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네 ….? 소양 대왕의 유언 …. ? ” 여불위는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몰라 적이 당황하였다.

여불위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소년 왕은 매우 못마땅한 눈살을 하며 다시 물었다.

“소양왕께서 승하하실 때, 내게 유언장을 내려 주시면서 <너는 이 유언장을 날마다 백 번씩 읽으며 네가 왕위에 오르거든 기어이 유언장대로 실천하여라> 하는 분부를 내리신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승상도 동석해 계시지 않으셨소?”

그것은 사실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8년 전 소양왕이 임종할 때 증손자인 정을 병석에 불러 놓고 그런 유언을 한 일이 있었고 여불위 자신도 분명히 그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여불위는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그 자리에는 소신도 분명히 동석해 있었사옵니다.” 소년 왕은 여불위의 대답을 듣고 이번에는 따지듯이 물었다.

“그 자리에 계셨으니 승상은 지금도 유언장의 내용을 소상하게 기억하고 계실 게 아니오 ?”

여불위는 매우 난처하였다. 8년 전 황망중에 들었던 유언장의 내용을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할 수가 있단 말인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오나 육국을 모조리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라는 유언이셨던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소년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잘 알고 계시구려. 이왕이면 그 유언장의 내용을 나에게 암송하여 들려주실 수는 없겠소?”

너무도 뜻밖의 요구에 여불위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8년 전에 무심코 들어 넘긴 유언장의 내용을 어떻게 암송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애가 분수가 없어도 유만부동이지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암송할 수가 있단 말인가 ….?) 그것은 무리한 요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여불위로서는 제왕의 하문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궁색해진 여불위는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대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매우 황공한 말씀이오나 유언장의 내용을 황망중에 들었기 때문에 천하를 통일하라는 요지(要旨)만은 기억하고 있사오나 전문은 기억을 못 하옵니다.”

소년 왕은 그 말을 듣자 얼굴에 분노의 빛이 솟구쳐 오르면서 눈알을 무섭게 부라리며 호통을 질렀다.

“소양 대왕의 유언은 이 나라의 국헌(國憲)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말씀이었소. 그런데 경은 승상으로 있으면서도 그것도 외우지 못한다는 말씀이오? 그러고서도 어떻게 승상의 직책을 수행한다는 말이오?” 무섭도록 놀라운 꾸지람이었다.

“황공하옵니다. 신의 수중에 그 유언장이 없기 때문에 …. ” 여불위가 거기까지 말하자 소년 왕은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승상은 그것을 변명이라고 하고 있소? 설사 그 유언장이 없다 하더라도 승상의 직책을 맡은 이상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유언장의 내용을 암송할 정도로 외워 두었어야 옳을 일이 아니오?” “황공하옵니다.” 머리를 연방 조아리는 여불위의 등골에서는 진땀이 흘러 내렸다.

소년 왕 정은 이미 자기 아들이 아니라 일국의 절대권을 가진 전제 군주라는 실감이 뼈에 사무치도록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소년 왕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 옛날에 왕의 말씀은 절대권을 가진다고 나에게 누누이 가르쳐 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승상이었소. 따라서 선왕의 유언은 나의 명령보다도 더 절대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오. 그런데 승상은 선왕의 유언조차 제대로 외지 못하고 있으니 그러고서야 나의 명령인들 어찌 제대로 수행 할 수가 있겠소?”

태질을 하는 듯한 가혹한 질책이었다.

여불위는 소년 왕을 <내 자식>이라는 생각에서 지금까지 은근히 얕잡아 보아 왔었다. 그러나 정작 왕좌에 올라앉아 왕권을 휘두르기 시작하니 이제는 어느 모로 보아도 당당한 대왕이지 내 자식일 수는 없었다.

이런 형편이고 보니 소년 왕이 오늘이라도 <승상 자리를 내놓으시오> 하면 당장 그날로 쫒겨나야 할 판이요 <저자의 목을 베라!>고 하면 그날로 목이 날아갈 판이었다.

(내가 아비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려 두었어야 했을 것을 이제는 때가 늦었구나… !) 여불위는 눈앞의 영화에 눈이 어두워 몸을 지나치게 사려 왔던 지난 날이 후회 막급이었다.

소년 왕은 문제의 유언장을 여불위에게 내밀어 주면서 말했다. “이 유언장을 드릴 테니 오늘 밤으로 다 외우고 내일 아침에 나에게 다시 돌려주시오.”

마치 어른이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홍은이 망극하옵니다. 분부대로 어김없이 거행하겠나이다.”

여불위는 유언장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어전을 물러나오면서 주희와의 내통관계를 하루속히 청산해 버려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 일이 탄로나는 날이면 목이 날아갈 것이 불을 보듯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감천궁으로 주희를 찾아가니 주희는 속도 모르고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하면서 “어서 오세요. 어제 다녀가셨는데 오늘은 웬일이세요. 피차간에 그립기는 서로가 똑같은 모양이죠?” 하고 꼬리를 치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닌가?

여불위는 주희에게 조금 전에 궁에서 당한 일을 낱낱이 들려주고 나서 “우리가 계속 만나다가는 무슨 참변을 당하게 될지 모르니 오늘로서 손을 끊기로 하자구! ” 하고 말했다.

그러자 주희는 “그것만은 안 돼요. 당신이 만나 주지 않으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예요!” 하고 앙탈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만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미 아비가 자식 때문에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돼요!” “그 아이는 이미 우리들의 자식이 아니고, 이 나라의 대왕이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도 목숨을 걸고 만나자는 말인가?”

“내 나이 이제 겨우 서른두 살이에요. 인생은 지금부터가 한창인데 나더러 어쩌라고 독수 공방을 하란 말이예요. 누가 뭐래도 그것만은 안 돼요!”

주희는 그렇게 쫑알대며 여불위를 우격다짐으로 침실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여불위는 마지못해 침실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나 마음이 어수선하여 욕정이 제대로 동할 리가 없었다.

“오늘은 왜 이꼴이예요. 이래 가지고 무엇에 쓰겠어요!” 주희의 넋두리를 듣는 순간 여불위는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내가 못 쓰게 되었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을 하나 천거해 주기로 할까 ? ” 하고 말을 하자,

” ….. “

주희는 그 말에는 대답을 아니한다. 소년 왕과 그의 어미 주희는 여불위로서는 실로 골치 아픈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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