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熱國誌) (17)

O 연(燕), 위(魏)의 멸망 진왕은 형가의 암살 미수사건으로 크게 노하여 조나라에 주둔중인 왕전 장군에게 20만 군사를 추가로 보내 주면서 연나라를 쳐서 귀족 양반들을 씨도 없이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왕전이 30만 대군을 휘몰아쳐 연으로 쳐들어가니 연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진군과의 전투에서 연전 연패를 거듭한 연왕은 성문을 굳게 잠그게 하고, 비상 대책회의를 열었다. "진군의 기세가 막강하여 우리로서는 대항할 방도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열국지(熱國誌) (16)

O 자객 형가(荊軻)나라가 잘 되려면 충신이 많아야 한다. 진나라에는 명장들이 수 없이 많았는데 그들 모두가 충신이어서 진이 강대국이 된 것도 그들의 덕택이었다.  그러나 그중에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는 명장 번어기(樊於期) 장군이었다. 번어기 장군은 성품이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대쪽같이 곧은 무장인지라 평소에도 <아무리 대왕의 명령이라 하여도 무조건 복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시비비를 가림없이 무조건 복종만 한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나 대왕을 위해서나 결코...

열국지(熱國誌) (15)

O 한(韓), 조(趙)의 멸망 노애의 반란 사건이 마무리 되자 진왕은 승상 이사를 불러 물었다. “그동안 내정(內政)이 어수선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던 사업이 지연 되었소. 이제 다시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야 하겠는데 어느 나라부터 정복하는 것이 좋을지 경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소이다.” 이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는데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국력이 가장 약한 한나라를 먼저 쳐서 손쉬운 싸움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군사들의 사기도 높일 수 있으리라 사료 되옵니다.”...

열국지(熱國誌) (14)

O 여불위와 노애의 몰락 노복을 천 명씩이나 거느리고 태후 주희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둘과 호화로운 영화를 누리고 있는 노애는 시간이 흐를수록 엉뚱한 욕심이 무럭무럭 끓어 올랐다. 그것은 기회를 보아 진왕을 쫒아내고 자기 아들을 그 자리에 올려 앉히고 싶은 야심이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아들을 형제나 두었으니 이제는 현왕을 쫒아내고, 우리들의 아이를 왕으로 내세워야 할 게 아닌가?" 노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노골적으로 나오게 되자 주희는 몸을 떨며 말했다. "그건 안...

열국지(熱國誌) (13)

O 간부(姦夫) 노애열세 살에 등극한 소년 정(政)이 열 아홉 살이 되자, 승상을 제쳐 놓고 국정을 직접 관장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권력의 직접 행사의 농도는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는 승상조차 턱으로 가리키며 지시하는 오만한 독재자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천하를 통일하려는 집념은 날이 갈수록 강렬해져서 진나라 백성들은 노약(老若)을 막론하고 자나깨나 군사 훈련으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절대 군주도 천재지변(天災地變) 앞에서는 속수 무책인고로 진왕 6년에...

열국지(熱國誌) (12)

"권력의 달콤함 때문에 후일 신세를 망치기 쉽다." 이 무렵 진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 가운데 영토가 제일 넓었다. 북방 경계는 멀리 호령, 곡구(谷口)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양자강 지류인 경수(涇水)와 황하 상류인 위수(渭水)를 둘러싼 곡창 지대와 서쪽으로는 서촉(西蜀)의 태산 준령이 가로 막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주었고,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효산(肴山)이 있어서 천혜의 난공불락(難功不落)의 성채가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는 쉬워도...

열국지(熱國誌) (11)

○ 여불위의 골치 아픈 존재 화창한 어느 봄날 진도(秦都) 함양(咸陽)에서 50리 쯤 떨어진 야외 넓은 들에서는 아침부터 난데없는 진조대전(秦趙大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조나라를 가상의 적으로 하는 군사 훈련 이었지만 치열한 공방전은 실전을 방불케 하였다. 진군의 총사령관은 열다섯 살의 소년 왕 자신이었고, 조군의 총사령관 역에는 진나라의 명장인 몽오 장군이었다. 마상의 소년왕은 장검을 하늘 높이 치켜 들고 가상의 적진으로 달려나가며 "적을 섬멸할 때는 바로 이때다!...

열국지(熱國誌) 10

열국지(熱國誌) 10

○ 여불위(呂不韋)의 고민 장양왕이 급서(急逝) 하고, 후일 천하를 통일하는 진시황(秦始皇), 소년 정이 열세 살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승상인 여불위가 국정을 전담하게 되었다.(나의 아들이 왕이 되었고, 태후인 주희는 나의 정부이고 보니 이제 진나라는 사실상 나의 나라다!) 사람 장사에 뜻을 두고 큰일을 도모한 지 14년, 여불위는 마침내 진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남편이 죽고 나자 주희의 애욕은 더욱 강렬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는 남편의 눈을 남모르게...

열국지(熱國誌) 9

열국지(熱國誌) 9

○ 지혜로운 사공자, 신릉군(信陵君) 초나라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나자 이번에는 위나라와 군사 동맹을 서둘러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평원군은 위나라와의 교섭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위왕의 아우인 지혜로운 사공자중에 한사람인 신릉군은 위왕의 아우인 동시에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데다가 평원군의 손아래 동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국적은 다르지만, 평원군이 신릉군의 고매한 인격에 매혹되어 자기 처제와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평원군이...

열국지(熱國誌) 8

○ "지혜로운 사공자" 중에 한 사람 조나라 평원군(平原君) 조왕(趙王)은 진군에게 37개의 성을 빼앗긴 데다가 "명년 봄에 다시 쳐들어 오겠노라"는 통고까지 받고 나니 국가의 존망이 크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사공자로 불리는 현명한 아우인 <평원군>을 불러 상의한다. "진군이 명춘에 다시 쳐들어오겠다고 하고 돌아갔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 평원군이 대답하는데, "우리의 힘 만으로는 진군을 당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똑같은...

열국지(熱國誌) 7

by | Mar 4, 2020 | Uncategorized, 열국지 | 0 comments

○ 자초의 등극과 여불위의 출세… (여씨 춘추 발간의 유래)

소양왕이 서거하자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를 효문왕(孝文王)이라 칭했다. 안국군이 등극함에 따라 자초가 태자로 책립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불위로 보면 득세(得勢)의 길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트인 셈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새로 등극한 효문왕이 건강이 워낙 좋지 않아서 왕위에 오른지 불과 사흘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불과 사흘 사이에 두 명의 왕이 잇달아 서거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자초가 왕위에 오를 차례였다. 그러나 자초는 연달아 발생한 불상사에 가슴이 아파서 “두 분 선왕께서 연거푸 돌아가신 이 때에, 내 어찌 당장 왕위에 오른단 말이오. 이것은 효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소상(小祥)이나 지난 뒤에 등극하겠소.” 하고 엉뚱한 고집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효성이 망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중신들은 허리를 굽혀 절하며 이렇게만 말할 뿐 아무도 반론을 하지 않았다.

이에 여불위는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천하의 정세가 분분한 이 시기에 보위(寶位)를 어찌 하루인들 비워 둘 수 있으오리까? 이것은 법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하시는 일이기도 하옵니다. 진정으로 효도를 하시려면 마당히 오늘로 등극하시어 국기(國基)를 더욱 굳건히 하시옵소서. 전하로서의 효도의 길은 오직 그 길이 있을 뿐이옵니다.”

말인즉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여불위가 이렇게 강력한 주장을 펴는데는 그 나름대로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모든 일에는 기회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자초처럼 감상에 사로잡혀서 등극을 미루다가는 왕위를 어느 귀신에게 빼앗겨 버릴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나?

더구나 자초에게는 배 다른 다른 형제가 스물두 명이나 있어서 그들도 저마다 왕위을 은근히 넘겨다 보고 있을 것이 아닌가 … ? 생각이 이에 이른 여불위는 중신들을 노여운 눈초리로 둘러보며 엄포라도 하듯 이렇게 따져들었다.

“나라를 올바르게 인도해 나가야 할 중신들은 무슨 생각에 침묵을 지키고 계시오. 나랏님의 자리를 오랬동안 비워 두어도 괜찮다는 생각들이오? 그렇지않으면 태자를 제쳐놓고 다른 왕자를 등극시키려는 생각이라도 하고 계신가요? 만약 그런 생각이 있거든 이 자리에서 숨김 없이 털어놓아 보시오.”

<동궁 국승>이라는 지위가 제아무리 높아도 실무(實務)를 하는 중신의 지위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불위가 중신들을 부라려 보며 호통을 친다는 것은 직위에 어긋나는 망동이었다. 그러나 중신들은 자초와 여불위간에 특별한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불위의 호통에 모두들 몸을 떨었다. 자초가 등극하는 날이면 여불위가 모든 권력을 한손에 거머쥐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에 중신들은 몸을 떨며 입을 모아 말했다.

“동궁 국승의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인 줄로 아뢰옵니다. 보위는 하루라도 비워 둘 수 없는 일이오니 전하께서는 오늘로 즉위하시는 것이 타당하옵니다.” “음 …., 경들의 의견이 그렇다면 …..”

이리하여 자초가 마침내 왕위에 오르니 그를 장양왕(莊襄王)으로 칭했다.

장양왕은 즉위식이 끝나자 만조 백관들 앞에서 여불위를 특별히 불러 내어 감격어린 어조로 이렇게 분부하였다.

“내가 오늘날 보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경의 덕택이었소. 경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던들 내 어찌 조나라를 탈출할 수가 있었을 것이며, 탈출을 못 했다면 어찌 보위에 오를 수가 있었을 것이오. 내 이미 보위에 올랐으니 이제는 처음의 약속대로 경을 승상에 제수하겠소.”

<승상>이란 지위는 왕의 다음가는 권력의 자리이다. 여불위에게 중책(重責)이 맡겨지리라고 예측을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너무도 파격적인 등용에 중신들은 입을 벌리며 놀랐다.

“홍은이 망극하옵니다. 신 여불위, 천학 비재(淺學非才)하오나 신명을 다해 대왕을 보필하겠사옵니다.”

여불위가 바닥에 엎디어 사은숙배(謝恩肅拜)하자 장양왕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고맙소이다. 경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내 워낙 경륜이 부족한 사람이니 모든 국사는 승상과 상의하여 처리해 나가도록 하겠소.”

그리고 중신들을 돌아보면서 말하는데
“중신들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여 승상은 나의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경륜이 천하에 뛰어난 어른이시오. 그러므로 경들은 여 승상을 나처럼 여기고 충성스럽게 받들어 모시도록 하시오.”

왕이 이정도로 나오니 제아무리 경륜이 많은 중신이라하여도 여불위를 감히 제대로 쳐다볼 수 조차 없었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장양왕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게 여겼는지 다시 이런 분부를 내렸다.

“아울러 경에게는 <문신후(文信侯)>를 제수하며, 성동(城東)에 있는 50식읍(食邑) 10만 호의 영지(領地)를 별도로 하사하오.”

여불위가 장양왕에게 하사 받은 50식읍 10만 호의 영지는 가히 조그만 나라 하나의 크기였다.

(승상의 자리에다 10만 호, 50식읍의 문신후 ….. ? )

여불위는 꿈을 꾸는 것 같아 자기 자신의 입술을 깨물어 보았다. 아프다. 아픈 것을 보면 꿈이 아닌 것이 확실하였다.

권력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어서 여불위가 승상에 자리에 오르자 그날부터 그의 집에는 축하객과 아첨배들이 천객 만래(千客萬來) 하였다. 그중에는 백발이 성성한 중신들도 있었고, 명성이 자자한 선비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일등 재상의 눈에 띄기 위해 천하의 재사,현사들이 앞다투어 여불위의 집에 구름 처럼 모여들었던 것이었다.

구름떼 처럼 모여드는 문객(門客)들을 접대하자니 여불위의 집은 노복(奴僕)만도 3백 명이 넘게 되었다. 게다가 여불위의 시중을 드는 시녀만도 백 명이 넘었다.

(영화를 이렇게나 누리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는 여씨 가문을 영원히 빛낼 수 있는 사업을 하나 일으켜 보았으면 싶은데 뭐가 좋을까?) 여불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지혜로운 사공자(四公子)>가 떠올랐다.

지혜로운 사공자란 전국 칠웅 시대부터 여러 나라의 세도 있는 왕족들이 천하의 재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다가 빈객(賓客)으로 접대해 오는 풍습이었다. 그들을 통상 식객(食客) 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식객중에는 경륜이 탁월한 정객도 있었고, 초야에 묻혀 지내다 기회를 찾던 선비도 있었고, 변설(辯舌)이 능란한 논객도 있었고, 점술이 탁월한 술사도 있었지만 힘이 남달리 세거나 도적 솜씨가 비상한 사람도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방면에서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면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가 융숭하게 대접을 해왔다.

주인의 대접이 융숭하다 보니 식객들도 주인을 소중히 받들어 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따라서 주인의 신변에 어려운 일이 생기라치면 식객들은 자기의 일처럼 각자의 재주를 짜내어 주인을 도와주었다. 말하자면 주인과 식객과의 인간관계가 동지적인 의리로 결합되어서 은연중에 무시 못 할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울타리라고 볼 수 있었는데 울타리 치고는 이처럼 믿음직스러운 울타리가 없었다.

그 무렵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세도 있는 왕족치고 식객 2,3백 명쯤 거느리지 않은 왕족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도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같은 왕족은 식객을 무려 3천여 명씩이나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사람들은 이들 네 사람을 <지혜로운 사공자>라고 불러오고 있었다.

여불위 자신도 문신후라는 작호를 받았기에 이제는 자기도 <지혜로운 사공자>를 본받아 양객(養客)으로 가명(家名)을 높여 보고 싶었다. 승상 여불위가 양객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원근 각지에서 내노라 하는 지사(志士), 현사(賢士), 논객(論客), 학자(學者), 술사(術士)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여들어 불과 두세 달 사이에 식객은 무려 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에 따라 가동과 노복들도 천 명으로 늘리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양객을 하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야 한다. 여불위는 워낙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이라 막대한 돈을 써 가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놀려 두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식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이런 제안을 하였다.

“귀공들은 모두가 학문에 해박한 선비들이오. 선비가 학문을 게을리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니 오늘부터는 여러분이 힘을 모아 책을 저술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책을 저술하오리까?” “내가 알기로 공자는 일찍이 <춘추(春秋)>라는 역사책을 편찬한 일이 있었소. 그러므로 귀공들은 춘추 이후의 역사를 편찬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비용은 얼마든지 대 드릴 터이니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책을 한번 편찬해 보도록 하오. 그래서 그 책이 완성되거든 책이름을 <여씨 춘추(呂氏春秋)> 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말하자면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여씨 가문의 명성을 길이 빛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여씨 춘추>는 그로부터 7년 후에 식객들의 손에 의해 26권이라는 방대한 부피의 책으로 발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춘추 전국시대의 모든 사상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정치와 생활의 참고로 삼기위해 저술된 시대를 볼 수 있는 일종의 백과사전으로써 이것은 오로지 여불위의 혜안과 착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여불위의 문화적 식견이 얼마나 높았는지 후세에서도 알 수 있게 된 것은 <여씨 춘추>의 저술이었던 것이다.

한편, 식객들에게 위와 같은 부탁을 하고 그들의 뒷 일을 보아 주던 와중인 어느 날, 여불위는 장양왕의 부르심을 받고 대궐로 입시하였다.

“대왕 전하! 불러 계시옵니까?” 여불위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자 장양왕은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승상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왕이 신하에게 <부탁>이라니 당치 않은 말이지만 장양왕은 일찍이 조나라에서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에 여불위에게 큰 신세를 진 바 있는지라 여불위에게 만큼은 왕의 행세를 하기가 거북했던 것이었다.

“무슨 분부이시온지, 하명하시옵소서.” “승상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내가 볼모로 잡혀가서 조왕에게 7년 동안이나 가혹하게 박해를 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오. 따라서 다른 나라는 내버려두더라도 조나라만은 기어이 원수를 갚아야 하겠소. 그러니 승상은 나의 심정을 헤아려서 조나라를 징벌하기로 합시다.”

여불위는 장양왕이 조나라에 품고있는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곧 어명에 따라 군사를 일으켜 조를 치기로 하겠습니다.”

여불위는 물론 무장(武將)은 아니다. 그러나 승상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려면 무엇인가 뚜렸한 공적을 세워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다행히 진나라에는 기라성 같은 명장이 수두룩 하였다. 여불위는 그들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미리 주물러 두었으므로 군사를 일으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불위가 왕명을 굳건히 받아들일 표정을 보이자 장양왕이 물었다.

“싸우면 우리가 승리할 자신은 있겠지요?” “조나라를 송두리째 멸망시키기는 당장은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국경 지대의 성읍 몇 개쯤 빼았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원한을 다소나마 풀어 주면 고맙겠소이다.”

여불위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조속히 군사를 일으켜 신금(宸襟)을 평안하게 해 드리겠나이다.”

여불위는 퇴궐하는 길로 몽오(蒙鰲), 장한(章悍), 왕전(王剪) 장군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명했다. “우리는 어명에 의해 조나라를 치게 되었소. 몽오 장군은 원수가 되고, 장한 장군과 왕전 장군은 좌우익(左右翼) 사령관이 되어 20만 군사를 3대로 나누어 조를 치도록 하시오. 세 장군이 합심하면 승리를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세 사람에게 각각 전축금(前祝金)을 두둑하게 건네주며 이렇게 격려하였다.

“나는 세 장군의 풍부한 지략과 탁월한 전술을 전적으로 신임하오. 그래서 세 장군에게 특별히 중책을 맡기는 바이니 일치 단결하여 기필코 승리하도록 하시오. 이번에 승리하고 돌아오면 세 분의 명성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자자손손까지 무한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오.”

여불위는 사람의 심리를 헤아리는 재주가 남달리 비상하여 엄격할 때에는 추상 열일(秋霜烈日) 같다가도 회유책을 쓸 때에는 어머니보다도 자애로운 일면이 있었다.

세 장수는 과분한 지우(知遇)에 크게 감동되어, “승상의 뜻을 받들고, 신명을 다해 기필코 승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굳은 맹세를 뒤로하고 장도에 올랐다.

진나라의 20만 대군이 3대로 나뉘어 조나라를 쳐들어가는데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기마(騎馬)는 산야에 넘치고, 정기(旌旗)는 하늘을 덮어서 그 위풍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조나라는 전국 칠웅 중에서 제(齊), 초(楚)와 함께 비교적 강한 국가이기는 하였지만 그 크기는 진나라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을 두고 진에게 수없이 시달려 왔기 때문에 진군이 또다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의 군사들은 싸우기도 전에 겁부터 집어먹었다.

그리하여 진군은 이렇다 할 싸움도 안해 보고 불과 한 달 남짓 사이에 37개 성을 무혈 점령하고, 조나라의 요충인 태원성(太原城)을 겹겹이 에워싸 포위해 버렸다.

조에서는 태원성이 함락되는 날이면 도성인 <한단>이 위태로워질 형편이었다.

태원성을 포위하고 10여 일이 경과하자 이번에는 태원 성주가 백기를 들고 제 발로 걸어나와 몽오 장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왕은 그 비보를 받고, 대책 회의를 긴급히 열었다.

“태원성이 함락되어 이제는 도성이 위태롭게 되었소.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승상 인상여(藺相如)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사태가 위급하오니 성루를 높이 쌓고 외각으로 돌아가며 늪을 깊게 둘러 파서 진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적이 도성을 포위하더라도 군량 조달로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이오니 우리는 그 사이에 위(魏)와 초(楚)에 사신을 보내어 응원군을 청해야 할 것이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군사를 총동원하여 늪을 파고 성루를 높이 올려 쌓게 하였다.

진군이 한단성으로 진격 해 온것은 그로부터 며칠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진군이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조군은 죽은 듯이 성안에만 틀어박힌 채 일체 응전하지 않았다.

승상, 인상여가 예상한 대로 진군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군량이 몹시 궁핍하였다. 게다가 마침 계절이 겨울이어서 군사들이 동상(凍傷)과 기한(飢寒)으로 연달아 죽어 나가고 있었다.

이에 몽오 장군이 그 사실을 본국에 보고하니 본국에서는 <37개 성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흡족하니 즉시 회군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몽오 장군이 “명년 봄에 다시 와서 한단성을 기필코 함락시키고야 말리라!”는 장담을 남기고 돌아오니 장양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우선 37개의 성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나의 원한이 많이 풀렸소. 여 승상과 장군들이 모두 힘을 합해 나의 뜻을 받들어 준 결과이니 고맙기 그지없소! “

이리하여 여불위는 승상으로서 공로를 크게 세웠다. 그는 세 장군을 따로 불러서, 그들의 전공을 극구 치하해 주기를 잊지 않았다. 이런 모양으로 진나라의 국세가 크게 확장해 나가자 여불위에 대한 국민의 신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여불위는 사람 장사를 기막히게 잘 하는 재수가 억세게 좋은 사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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