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熱國誌) (17)

O 연(燕), 위(魏)의 멸망 진왕은 형가의 암살 미수사건으로 크게 노하여 조나라에 주둔중인 왕전 장군에게 20만 군사를 추가로 보내 주면서 연나라를 쳐서 귀족 양반들을 씨도 없이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왕전이 30만 대군을 휘몰아쳐 연으로 쳐들어가니 연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진군과의 전투에서 연전 연패를 거듭한 연왕은 성문을 굳게 잠그게 하고, 비상 대책회의를 열었다. "진군의 기세가 막강하여 우리로서는 대항할 방도가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열국지(熱國誌) (15)

O 한(韓), 조(趙)의 멸망 노애의 반란 사건이 마무리 되자 진왕은 승상 이사를 불러 물었다. “그동안 내정(內政)이 어수선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던 사업이 지연 되었소. 이제 다시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야 하겠는데 어느 나라부터 정복하는 것이 좋을지 경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소이다.” 이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는데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국력이 가장 약한 한나라를 먼저 쳐서 손쉬운 싸움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군사들의 사기도 높일 수 있으리라 사료 되옵니다.”...

열국지(熱國誌) (14)

O 여불위와 노애의 몰락 노복을 천 명씩이나 거느리고 태후 주희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둘과 호화로운 영화를 누리고 있는 노애는 시간이 흐를수록 엉뚱한 욕심이 무럭무럭 끓어 올랐다. 그것은 기회를 보아 진왕을 쫒아내고 자기 아들을 그 자리에 올려 앉히고 싶은 야심이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아들을 형제나 두었으니 이제는 현왕을 쫒아내고, 우리들의 아이를 왕으로 내세워야 할 게 아닌가?" 노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노골적으로 나오게 되자 주희는 몸을 떨며 말했다. "그건 안...

열국지(熱國誌) (13)

O 간부(姦夫) 노애열세 살에 등극한 소년 정(政)이 열 아홉 살이 되자, 승상을 제쳐 놓고 국정을 직접 관장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권력의 직접 행사의 농도는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는 승상조차 턱으로 가리키며 지시하는 오만한 독재자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천하를 통일하려는 집념은 날이 갈수록 강렬해져서 진나라 백성들은 노약(老若)을 막론하고 자나깨나 군사 훈련으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절대 군주도 천재지변(天災地變) 앞에서는 속수 무책인고로 진왕 6년에...

열국지(熱國誌) (12)

"권력의 달콤함 때문에 후일 신세를 망치기 쉽다." 이 무렵 진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 가운데 영토가 제일 넓었다. 북방 경계는 멀리 호령, 곡구(谷口)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양자강 지류인 경수(涇水)와 황하 상류인 위수(渭水)를 둘러싼 곡창 지대와 서쪽으로는 서촉(西蜀)의 태산 준령이 가로 막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주었고,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효산(肴山)이 있어서 천혜의 난공불락(難功不落)의 성채가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는 쉬워도...

열국지(熱國誌) (11)

○ 여불위의 골치 아픈 존재 화창한 어느 봄날 진도(秦都) 함양(咸陽)에서 50리 쯤 떨어진 야외 넓은 들에서는 아침부터 난데없는 진조대전(秦趙大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은 조나라를 가상의 적으로 하는 군사 훈련 이었지만 치열한 공방전은 실전을 방불케 하였다. 진군의 총사령관은 열다섯 살의 소년 왕 자신이었고, 조군의 총사령관 역에는 진나라의 명장인 몽오 장군이었다. 마상의 소년왕은 장검을 하늘 높이 치켜 들고 가상의 적진으로 달려나가며 "적을 섬멸할 때는 바로 이때다!...

열국지(熱國誌) 10

열국지(熱國誌) 10

○ 여불위(呂不韋)의 고민 장양왕이 급서(急逝) 하고, 후일 천하를 통일하는 진시황(秦始皇), 소년 정이 열세 살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승상인 여불위가 국정을 전담하게 되었다.(나의 아들이 왕이 되었고, 태후인 주희는 나의 정부이고 보니 이제 진나라는 사실상 나의 나라다!) 사람 장사에 뜻을 두고 큰일을 도모한 지 14년, 여불위는 마침내 진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남편이 죽고 나자 주희의 애욕은 더욱 강렬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는 남편의 눈을 남모르게...

열국지(熱國誌) 9

열국지(熱國誌) 9

○ 지혜로운 사공자, 신릉군(信陵君) 초나라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나자 이번에는 위나라와 군사 동맹을 서둘러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평원군은 위나라와의 교섭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위왕의 아우인 지혜로운 사공자중에 한사람인 신릉군은 위왕의 아우인 동시에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데다가 평원군의 손아래 동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국적은 다르지만, 평원군이 신릉군의 고매한 인격에 매혹되어 자기 처제와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평원군이...

열국지(熱國誌) 8

○ "지혜로운 사공자" 중에 한 사람 조나라 평원군(平原君) 조왕(趙王)은 진군에게 37개의 성을 빼앗긴 데다가 "명년 봄에 다시 쳐들어 오겠노라"는 통고까지 받고 나니 국가의 존망이 크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사공자로 불리는 현명한 아우인 <평원군>을 불러 상의한다. "진군이 명춘에 다시 쳐들어오겠다고 하고 돌아갔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 평원군이 대답하는데, "우리의 힘 만으로는 진군을 당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똑같은...

열국지(熱國誌) 7

○ 자초의 등극과 여불위의 출세... (여씨 춘추 발간의 유래) 소양왕이 서거하자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를 효문왕(孝文王)이라 칭했다. 안국군이 등극함에 따라 자초가 태자로 책립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불위로 보면 득세(得勢)의 길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트인 셈이었다. 그러나 행운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새로 등극한 효문왕이 건강이 워낙 좋지 않아서 왕위에 오른지 불과 사흘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불과 사흘 사이에 두 명의 왕이 잇달아 서거한 것이었다....

열국지(熱國誌) (16)

by | Mar 20, 2020 | 아지트, 열국지 | 0 comments

O 자객 형가(荊軻)

나라가 잘 되려면 충신이 많아야 한다. 진나라에는 명장들이 수 없이 많았는데 그들 모두가 충신이어서 진이 강대국이 된 것도 그들의 덕택이었다.
  그러나 그중에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는 명장 번어기(樊於期) 장군이었다. 번어기 장군은 성품이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대쪽같이 곧은 무장인지라 평소에도 <아무리 대왕의 명령이라 하여도 무조건 복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시비비를 가림없이 무조건 복종만 한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나 대왕을 위해서나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의 신념을 결코 굽히려 하지 않았다.

번어기는 평소에는 이처럼 신념이 강한 무장인 까닭에 진왕이 조나라를 점령하고 나서 선왕의 원수를 갚는다며 무려 3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을 토갱 속에 생매장을 해 버렸다는 소리를 듣자 크게 노했다.

“나라만 평정해 버렸으면 그만이지 백성들이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3만 명 씩이나 생매장을 해 버렸단 말인가?” 그것은 말도 안되는 짓이다. 내 어찌 이처럼 잔학무도한 사람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번어기는 그렇게 분노하며 연(燕) 나라로 망명해 버리고 말았다.

그 당시 진나라와 연나라의 사이는 몹시 나빴기 때문에 번어기는 그리로 망명을 갔던 것이다. 진왕은 번어기가 자기를 배반하고 연나라로 망명해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길길이 분노하였다.

한편, 연나라에서는 번어기가 망명해 온 사실을 놓고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였다.

연나라 태자 단우(丹又)가 번어기의 망명을 받아 들이려고 하자 태부(太傅) 국무(鞠武)가 정면으로 반대하며 말했다. “우리가 가뜩이나 진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판인데 번어기의 망명까지 받아들이면 두나라의 관계가 더욱 험악해질 것이옵니다.”

그러자 태자 단우가 즉각 대답한다. “나도 그 점을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우리를 믿고 도망온 사람을 쫒아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우리는 진을 치고 싶어도 힘이 부족해 참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겁내어 망명 온 사람 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없지 않겠소 ?”

국무가 심사숙고를 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전광 선생(田光先生)과 상의하여 결정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전광 선생이란 연나라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추앙을 받고 있는 늙은 처사(處士)였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이 전광 선생을 함께 찾아 뵙고 상의해 보도록 합시다.”

태자 단우는 태부 국무와 함께 깊은 산중으로 전광 선생을 찾아갔다. 전광 선생은 80객으로 뼈와 가죽만이 남은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움막 같은 오막살이로 정중하게 맞아 들이며 묻는다. “존귀하신 태자께서 어찌 이 누옥(陋屋)을 몸소 찾아주셨습니까?” 그렇게 물어 보는 전광 선생의 두 눈에서는 푸른 광채가 넘쳐 나고 있었다.

태자 단우는 전광 선생을 찾아오게 된 연유를 자세히 설명을 하고 나서 “번어기 장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선생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하고 말했다.

전광 선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기력이 왕성할 때에는 하루에 일천 리를 달라는 준마(駿馬)도 기력이 쇠약해지면 하루에 일백 리밖에 못 달리는 노마(駑馬)에게 오히려 뒤진다는 말이 있사옵니다. 미수(米壽: 88세)를 눈 앞에 둔 제게 무슨 좋은 생각이 있으리라고 이 먼 곳까지 귀하신 걸음을 하셨사옵니까?” “겸손하신 말씀이십니다. 부디 좋은 지혜를 가르쳐 주소서.” 이에 전광 선생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며 말한다. “번어기 장군이 우리를 믿고 망명해 왔다면 우리로서는 응당 받아들여야 옳을 줄로 아옵니다. 그러한 신의도 없다면 어찌 나라를 지탱해 나갈 수 있으오리까. 아울러 진의 야욕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도 강구하심이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번어기 장군 문제와 함께 진의 야욕을 꺾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어떤 것이 있겠사옵니까?” “지금 천하의 대세를 보옵건대 우리나라와 진나라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사옵니다. 천하를 통일하려는 진왕의 야망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데다가 그는 이미 한(韓)과 조(趙)까지 정벌해 버렸으므로 이제는 우리나라가 목전의 표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옵니다.” 태자 단우는 전광 선생의 말에 심각해졌다.

“선생의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전광 선생은 조용히 입을 열어 다시 말한다. “진왕은 워낙 야망도 크고 포악한 인물인 까닭에 그를 살려 두었다가는 우리도 언젠가는 그의 손에 망하게 될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를 지켜 나가려면 자객을 보내서라도 우리 손으로 그를 없애 버려야 할 것입니다.”

태자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의 고견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 역시 자객을 보내 진왕을 죽여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선생께서 아시는 분 중에 그런 임무를 맡아 줄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저의 제자 중에 형가(荊軻)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는 40밖에 안 되었지만 학식도 풍부하고 검술도 매우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자객으로 쓰시면 능히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제가 직접 만나서 부탁하기보다도 선생께서 말씀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좋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일에 어찌 노고를 아끼오리까.” 이리하여 전광 선생은 자객 선정의 중책을 직접 맡고 나섰다.

태자 단우는 작별 인사를 나누고 궁으로 돌아 가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전광 선생을 다시 찾아왔다. 전광 선생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태자께서는 무슨 일로 되돌아오셨습니까?” “제가 부탁드려야 할 말씀을 깜빡 잊어버리고 갔기 때문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무슨 부탁이시온데 ….? ” “선생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 일은 국가의 중대한 기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선생과 의논한 일은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리옵니다.”

태자 단우의 말에 전광 선생은 약간 불쾌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국가의 존망을 가늠하는 중요한 일을 어찌 함부로 남에게 말하겠습니까.”

태자가 다시 작별 인사를 고하고 돌아가자 전광 선생은 사람을 시켜 형가를 불러다 말한다. “태자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라를 지켜 나가려면 진왕을 죽여 없애 버려야 하겠는데 그 임무를 맡아 줄 사람이 없다고 하시기에 내가 자네를 천거 했다네. 자네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 일을 맡아 줄 수 있겠는가?”

형가는 즉석에서 “선생께서 저를 천거해 주셨다면 저는 다시 없는 영광으로 알고 자객의 임무를 맡기로 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러면 근일 중에 자네가 태자를 직접 찾아가 만나 뵙도록 하게. 나는 오늘로서 중대한 임무를 다했기에 죽어 버릴 생각이니까, 자네는 태자를 만나 뵙거든 내가 죽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 주게나.” 형가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선생께서 오늘로 돌아가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전광 선생은 담담한 어조로 조용히 말을 한다. “태자께서 나와 작별을 하고 돌아가시다가 다시 나를 찾아오셔서 비밀이 누설되지 않토록 당부를 하셨네. 그것은 태자께서 나를 의심하시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러니 나는 의심 받을 것을 막음과 동시에 비밀을 영원히 감추기 위해서 오늘로 죽어 버릴 생각이네.” “그것은 태자가 나쁘지, 선생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도록 하소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자네는 중책이나 충실히 완수해 주게.”

그날 밤 전광 선생은 기어코 자결을 하고 말았다. 형가가 전광 선생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태자를 찾아가 그 사실을 고하니 단우는 회한의 눈물을 뿌리며 탄식하였다. “내가 불민하여 선생을 돌아가시게 했으니 이 죄를 무엇으로 씻어야 할 지 모르겠구려.”

형가가 말한다. “이미 돌아가신 어른은 어쩔 수 없으니 이제는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진왕을 살해할 계획이나 도모하기로 하십시다.” 진실로 그 선생에 그 제자였다.

태자 단우는 형가를 극진히 대접하며 말했다. “진왕은 머지않아 우리나라로 쳐들어 올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 남으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진왕을 사전에 죽여 없애야 하겠습니다. 선생은 수고스러우신 대로 나라를 위해 그 임무를 반드시 성공시켜 주시옵소서.”

형가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하는데 “진나라 대궐의 경계가 물샐틈 없이 삼엄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경계망을 뚫고 들어가서 진왕을 죽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저로서는 어려울 것 같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

“무슨 말씀을! 전광 선생께서 천거해 주신 분이 바로 선생이었는데 선생이 못 해 주신다면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이 이 중대한 일을 반드시 맡아 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러자 형가는 고개를 좌우로 기웃거리며 “그러면 제가 좀 더 생각해 볼 시간을 주시옵소서.” 하며 즉각적인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태자는 형가에게 상경(上卿)의 벼슬을 주어 태자궁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그런데 형가는 웬일인지 열흘이 지나고 스무 날이 가까워도 움직일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가운데 태자궁으로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진나라에서는 머지않아 연나라를 치려고 왕전 장군이 30만 대군을 맹훈련 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자는 초조하기 이를 데 없어서 마침내 형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은 지금 30만 대군의 훈련을 통하여 우리나라로 쳐들어 오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들이 역수(易水)를 건너 진격해 온다면 그때는 진왕을 살해할 기회를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형가가 대답한다. “저 역시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옵니다. 그러나 진왕을 살해하려면 그를 직접 만나는 것이 필수 조건이온데 그를 직접 만나려면 그가 저를 믿어줄 수 있는 어떤 물증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물증이 어디 있겠소?” “지금 우리 형편에 그런 물증이 단 한가지가 있기는 하오나 다만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주저하고 있을 뿐이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나라를 구할 수만 있다면 물증을 구해 볼 것이니, 어서 말씀해 보시지요.”

이에 형가는 무척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태자의 거듭되는 재촉을 받고서야 입을 열었다.” “진왕은 지금 자기를 배반하고 우리나라에 망명 와 있는 번어기 장군의 수급에 천만금의 현상금을 걸었사옵니다. 그러므로 번 장군의 수급과 우리나라 곡창인 <독항>의 상세한 지도를 함께 가지고 가면 진왕이 저를 기꺼이 만나 줄 것이옵니다. 그런 수단을 쓰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진왕을 직접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 할 것 이옵니다.”

형가가 태자에게 망명 온 번어기 장군의 목을 달라고 하니 그야말로 어렵기 그지 없는 제안이었다.

태자 단우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대답했다. “다른 조건이라면 뭐든지 들어 드릴 수 있어도 번어기 장군의 머리를 베어 드리는 것만은 못 하겠소이다. 우리를 믿고 망명해 온 사람을 어떻게 내 손으로 머리를 베어 드릴 수가 있으오리까?” 형가는 태자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든 안 되든 간에 제가 번어기 장군을 직접 만나 보기로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다음날 형가는 번어기를 직접 찾아가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하고 나서 물었다. “진왕을 살해하려면 그를 직접 만나야 하겠는데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번 장군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되옵니다. 오직 그 방법만이 우리나라도 구하고 장군의 원한도 풀어 들릴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지는데 장군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옵니까?”

번어기는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결연히 들며 말했다. “의를 위하는 일에 어찌 목숨을 아끼겠소. 내가 오늘 밤 스스로 목숨을 끊을 테니 나의 머리를 가지고 진나라로 들어 가서 폭군 진왕을 기어이 죽여 주시오.”

번어기는 그날 밤 약속대로 자결을 하였다.

태자 단우와 태부 국무가 전광 선생을 찾아 갔을 때, 전광 선생이 태자에게 번어기 장군의 망명을 받아 들이라고 한 것은 오늘과 같은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권고한 것이었다.
아울러 형가를 불러 앞으로 일어 날 일에 대하여 소상한 설명을 함과 동시에, 진왕을 암살하기 위해서는 번어 장군의 수급이 있어야만 진왕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이라는 예언을 들려준 바가 있었던 것이니 형가는 스승의 예지력에 감탄하며 번어기 장군과의 밀담을 태자 단우에게 전달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크게 놀라며 슬퍼하였다. 다음날 아침, 태자는 울면서 번어기의 시체를 수습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번어기의 머리와 날카로운 비수 한 자루를 형가에게 내주며 말했다.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제는 길을 떠나 주십시오. 내 수하에 진무양(秦舞陽) 이라고 칼을 잘 쓰는 소년이 하나 있으니 그 아이를 데리고 가셔서 그애더러 진왕을 죽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무양이라는 소년은 어떤 소년 입니까?” “이를테면 깡패의 두목쯤 되는 아이인데 싸움도 잘하거니와 사람 죽이기를 파리새끼 죽이듯 하는 소년 입니다.”

“이런 일에는 지혜와 담력이 필요하므로 사람을 잘 죽이는 재주만 가지고는 안 되옵니다. 제가 혼자 갈 테니 진무양은 따라 오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선생은 선물만 바치고 진왕을 죽이는 것은 그 아이에게 맡겨야 제 마음이 놓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꼭 데리고 떠나 주시옵소서.” 형가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태자의 권고가 하도 간곡하므로 진무양을 데리고 떠나기로 하였다.

며칠 후 형가는 진나라 국도 함양에 도착하여 진왕의 총신(寵臣: 총애받는 신하) 몽가(夢嘉)를 만나 진왕에게 드릴 폐백(번어기의 머리와 독항 지방의 지도)를 내보이며 진왕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몽가는 번어기의 머리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당신은 어떤 연유로 번어기의 수급을 가지고 오게 되었소?”

형가가 대답하기를 “연왕은 평소에 진왕 전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계시옵니다. 그러므로 진왕께서 저희 연나라를 형식적인 독립 국가로 인정해 주신다면 기꺼이 진왕 전하의 번신(藩臣)이 될 생각이시옵니다. 그런데 때마침 번어기가 진왕 전하를 배반하고 우리나라로 도망쳐 왔으므로 연왕은 그의 배반 행위를 매우 괘씸하게 여겨서 그의 머리를 베어 주시면서 진왕 전에 갖다 바치라고 하셔서 제가 가지고 왔사옵니다.”

“당신이 이런 귀중한 선물을 가지고 왔으므로 대왕 전하께서는 연왕의 충성을 매우 어여쁘게 여기실 것이오. 그러면 내가 이 선물을 대왕전에 곧 갖다 바치겠소.”

“그것은 아니 되시옵니다.” “뭐가 안 되겠다는 말이오?” “연왕이 분부하시기를, 이 선물은 제가 직접 진왕 전하께 바치도록 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 “이런 귀중한 선물을 중간에 사람을 놓아서 바쳤다가 혹시 잘못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스럽기 때문인 것이옵니다.”

몽가는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워낙 귀중한 선물이기 때문에 직접 바치고 싶어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겠소이다. 그러면 대왕전에 여쭈어서 내일 아침에 당신이 대왕전에 이 선물을 직접 바칠 수 있도록 주선해 보리다.”

다음날 아침, 형가는 몽가의 인도를 받으며 진무양과 함께 함양궁으로 입궐하였다.

진나라의 대궐에 들어가려면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는 궁문을 다섯 개나 통과해야 했다. 소년 진무양은 궁문을 통과할 때마다 겁에 질려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이 녀석아! 떨지마라. 이상한 눈치를 보이면 큰일나는 판이다.”

형가는 진무양에게 귀엣말로 조용히 타일렀다. 이윽고 마지막 중문을 들어서니 진왕은 저 멀리 정전(正殿) 용상 위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있었고, 돌층계 아래 좌우에는 중신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형가와 진무양은 돌층계 아래에 미리 깔아 놓은 돗자리까지 나아가 진왕 앞에 고두숙배(叩頭肅拜)하니 진왕은 두 사람을 굽어 보며 우렁찬 음성으로 말한다.

“연왕(燕王) 희(喜)가 나에게 좋은 선물을 보내 왔다고 들었는데, 이리 내놓아 보시오.”

형가는 번어기의 머리가 들어 있는 나무 상자를 두 손으로 받들고 층계를 올라가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은 상자 뚜껑을 손수 열어 번어기의 수급을 친히 검사해 보더니 흔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 번어기의 수급이 틀림 없구먼! “

그리고 이번에는 좌우의 중신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배신자의 말로는 이렇게 비참해진다는 사실을 경들도 깊이 인식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 형가를 다시 보면서 물었다. “선물이 하나 더 있다고 하던데 그것은 무엇이오?”

또 하나의 선물이란 독항 지방의 지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 소년이 올려 드릴 것이옵니다. 진무양아! 네가 들고 있는 선물 상자를 대왕전에 바쳐라.”

진무양이 들고 있는 상자 속에는 태자 단우가 하사한 비수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진무양이 그 상자를 들고 진왕 면전에 올리면서 전신을 와들와들 떠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중신들이 모두 수상하게 여겼다. 그러자 형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이 애야! 시골뜨기 아이가 어마어마한 대궐에 들어오니까 겁에 질려 온 몸을 떠는구나. 이리 오너라, 너 대신에 내가 대왕전에 선물을 바치려니 그 상자를 이리 내놓아라.”

형가는 비수가 든 상자를 진왕 앞으로 들고 올라와 “독항 지방의 지도는 이 상자 속에 들어 있사옵니다. 지도가 보자기로 여러 겹 싸여 있사오니 대왕께서 친히 풀어 보시옵소서.”

진왕이 겹겹이 싸여 있는 보자기를 하나씩 끌러 보니 그 안에는 서슬 퍼런 비수가 한 자루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형가는 오른손으로 비수를 움켜잡고, 왼손으로는 진왕의 옷소매를 다그쳐 잡으며 그의 가슴에 비수를 내리 찔렀다.

그러나 진왕은 본디 무술이 능한 인물인지라, 기겁을 하여 놀라며 몸을 피하는 바람에 옷소매만 잘리고 몸을 재빠르게 피했다.

형가는 비수를 움켜잡고 도망가는 진왕을 재빠르게 쫒아갔다. 진왕은 기둥을 둘러싸고 몸을 피하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검이 워낙 길어서 빠져 나오지를 않았다. 형가는 비수를 꼬나 들고 진왕을 쫒고, 진왕은 기둥을 둘러싸고 쫒겼다. 군신들은 너무도 뜻밖의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었다.

진나라의 법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궁중에 들어올 때에는 무기를 몸에 지니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왕의 호위 무사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궁문 밖에 있었다. 너무도 벼락 같은 사단이 일어났으므로 밖에 있는 호위 무사들을 불러들일 경황이 없었다. 쫒고 쫒기는 숨가뿐 추격전이 계속되는 동안 시의(侍醫) 하무차(夏無且)가 허리에 차고 있던 약주머니로 형가의 얼굴을 내리갈겼다. 그리하여 형가가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대왕이시여! 검집을 등에 둘러메고 칼을 뽑으시옵소서.”

진왕은 그제서야 쫒겨 도망을 가면서 검집을 등에 둘러메고 칼을 뽑으니 그제서야 검신(劍身)이 쭉 뽑혀 나오는 것이었다. 진왕은 검을 뽑기가 무섭게 형가를 내리갈겼다.

형가는 왼쪽 다리가 끊어지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쓰러지자 진왕의 얼굴을 향하여 비수를 힘차게 날려 보냈다.

그러나 비수는 진왕을 비켜 기둥 속에 깊이 박혀 버렸다. 그러자 진왕은 형가에게 덤벼들어 장검으로 닥치는 대로 찔러대었다.

형가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절규하였다. “아아, 통탄할 일이로다! 내가 너를 단숨에 죽일 수가 있었는데 천운이 따르질 않는구나!” “이놈아! 아직도 아가리를 놀리느냐!”

진왕은 벼락 같은 소리를 지르며 형가의 몸을 연방 장검으로 내리쳤다. 그러나 형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큰소리로 외쳐댔다. “네가 나를 죽여도 나의 정신만은 굽히지 못하리라. 천의(天意)를 유린한 침략자의 말로가 어찌 된다는 것을 너도 언젠가는 반드시 알게 될 날이 오리라!”

진왕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마침내 형가의 몸뚱이를 산산조각 내어 버렸다.

그리고 나서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서 “이 고깃덩이를 주워서 기름불에 태워 버려라!” 하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분부를 내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분부했다. “오늘의 위급함을 모면하는 데는 시의 하무차의 공로가 컸으니 그에게 황금 2백 일 (180 Kg)을 내려 주어라.”

이리하여 진왕을 암살하려던 자객 형가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진왕의 경호는 더욱 삼엄하게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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